타인을 모멸하는 이유
혐오주의의 원인은 주로 중산층 붕괴로 이야기된다. 지위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누군가를 내몰아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되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그렇게만 해석하기엔 그 대상이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다. 나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김치녀로 묶이고 결혼해서 전업부부를 하면 취집충, 아기를 낳으면 맘충, 설명하려 들면 설명충, 진지하면 진지충이 된다. 벌레가 아닌 사람으로 살기 참 어렵다. 이러한 일상적 혐오에 대해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 교수는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타인에 대한 모멸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니까 희미해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열패감을 보상받기 위해, 얄파한 우월감을 맛보기 위해 타인을 모멸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찌질한가.
자존감이 생성되는 과정
자존감의 본질은 자신에 대한 신뢰이자 행복을 누릴 만한 사람이라 여기는 자기 존중감이다. 이건 정신승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자신을 신뢰하긴 어렵고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 자신을 존중하기도 어렵다. 자존감은 스스로가 믿고 존중할 내면 세계를 세우고 그 신념을 바탕으로 삶을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을 지는 삶의 일련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내면의 힘이다.
선택들은 정신 깊은 곳에 쌓이고 그렇게 쌓인 결과를 자존감이라 부른다고 했다. 삶에서 자신이 내리는 선택이 모여 자존감을 이룬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죽이 되는 밥이 되든 그 결과 까지 책임질 때 얻어진다. 그런데 스스로 선택을 내리지 못하면 자기 신뢰를 쌓을 경험은 빈약해지고 빈약한 자기 신뢰로는 책임질 자신이 생기기 어렵다. 선태과 책임 자기신뢰는 톱니봐퀴처럼 맞물려 있기에 어느 하나 삐걱거리지 않고 굴러갈 때,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은 자존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다질 때 당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은 더욱 선명해 질 것이다.
두뇌 세척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갓떤 이의 말에 따르면, 미국 대학에는 "브레인 워싱 클래스"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내용인즉, 지금까지 배운 경제학 지식은 모조리 틀렸으니 두뇌를 세척하자는 수업이었다. 우리가 세계적인 석학들의 경제학 이론이 무엇인지 배울 때, 그들은 그 이론의 어떤 점이 틀렸는지를 찾아 냈고, 그렇기에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당연했던 것들에 질문하자. 당신이 믿어온 것이 정알 당신 내면의 목소로인지 아니면 어는 순간 의심 없이 따라온 타인의 목소리인지 묻자. 믿어왔던 진리에 대하여 질문할 때 우리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통념의 자리에 우리의 신념을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도 브레인 워싱 클래스가 필요하다.
'할'과 '될'의 차이
나이를 먹어서도 우리의 꿈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가”에 머물러 있을 때 발생한다. 우리에게 절실한 건, 위를 증멸할 명함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 없는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림자를 받아 들이고 인정하는 시점 부터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브 용은 개인이 숨기고 싶어하는 성격의 종합을 ‘그림자’라 이야기하며 누구나 그림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으며 건강한 내면을 갖기 위해서는 그림자와 화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하여 한 가지 감정만 갖는게 아니며 누구나 인정하기 싫은 찌질함과 이기적인 마음, 흑역사가 있다. 그런데 내면의 그림자가 보기 싫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개념은 뒤죽박죽이 되어 진짜 자신을 인식할 수 없게 되고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보다 건강한 내면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까지 자각하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 자신의 싫은 면들도 인정하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났을 때 감춰둔 욕망의 허용치를 둘 수 있고 그 허용치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있다. 외면과 변명을 멈추고 내가 좋아하는 나와 내가 싫어하는 내가 통합된 진짜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오만한 인간이 아닌, 인간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완벽하지 않아서 싫어하지 않는다. 완벽한 척하는 그 오만함에 질리는 거다.
지나온 길과 앞으로의 길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
필요한 건 후회가 아닌 평가이고
앞으로의 길을 내다볼 때
필요한 건 걱정이 아닌 판단이다.
관계의 거리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남이야?”라는 (당연히 남인데)말로 경계를 침범하는 관계에 익죽해졌고, 그 경계를 침범하는 것을 친밀함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그늘을 낱낱이 확인하고 경계를 잃는 것만이 좋은 관계는 아니며 친구라는 이름으로 경제의 통행권을 요구할 수는 없다. 설사 누군가의 경계가 너무 두텁다 해도 그걸 타인이 밖에서 깨고 말고 할 것은 아닐뿐더러 개인의 사적 영역을 완전히 헤집는 관계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좋은 관계란,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것이며, 좋은 우정이란, 친밀감을 느낄 수 있고, 한편으론 안정감이 담보될 수 있는 거리에서 애정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친구의 가치
Best Friend만을 기대하며
Good Friend의 가치를 잊지 말 것
친구가 변한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더 자기다워진 것이다.
그린라이트
당신이 누군가가 필요하듯이 누군가도 당신을 필요로 하며 완벽하지 않은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간다.
외롭다 해서 진실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외로움에 괴로움까지 더해질 뿐이다.
그 사람의 그린라이트 여부를 알고 싶다면? 가장 적절한 질문은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그 질문의 대답으로 “나는 그 사람이 좋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전진해야 할 [진짜] 그린라이트가 될 것이다.
사랑도 되면 한다 쯤으 생각으로 안전 거리 확보에만 열을 올린다면 겁쟁이에게 사랑은 너무 과분하다.
변화는 지구력
요요 현상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지속적인 관리이듯 때론 뒷걸음에, 때론 제자리 걸음에 답답하고 조바심이 날지라도 변화를 위해선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일이 그랬다. 변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화상이 생겼을 때, 흉터가 남지 않는 법 => 다른 방법은 없다. 상처를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꾸준히 나아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하루 네끼를 먹으며 살이 빠지길 바랄 수 없는 것처럼 희망을 품고 싶다면 방법을 찾아라. 그리고 방법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었다면 그 고단함을 견뎌내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막연한 희망이나 대안 없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행복은
깊이 느낄 줄 알고 ,
단순하고 ,
자유롭게 생각할 줄 알고 ,
삶에 도전할 줄 알며 ,
남에게 필요한 삶이 될 줄 아는 능력으로 부터 나온다.
누군가에게 행복하다고 증명하며 사는 것이 가장 불행하게 사는 방법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멀리하라.
자극적인 즐거움의 노예
감정을 견뎌야 하는 노동과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경쟁 속에 감정은 메말라갔고, 즐거움은 지루한 일상을 견더낸 보상이자 강렬한 자극으로 정의되었다. 이는 감정이 메마른 사이코패스들이 극도의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감정이 메마른 이들은 사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기에, 점점 자극적인 즐거움을 찾게 되는 거다. 하지만 자극적인 즐거움이 끝난 일상은 무료해지고, 생은 활기를 잃는다. 만약 당신이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면 삶의 앞마당에 있는 사소한 행복에 예민해지고 살아 있는 삶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즐거움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며 가능한 어릴 때부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와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건 구질구질하거나 초라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쉽게 행복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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